싱가폴은 전세계에서 주택 정책이 가장 성공적인 나라 중의 하나이다. 싱가폴인의 85%가 주택 개발 위원회가 공급하는 공동주택에 살고 있으며, 이 공동주택은 일률적으로 12-15층 규모로 건축되고 있다. 에릭 쿠의 은 싱가폴의 가장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이 HDB 아파트에 사는 세 가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즉, 가장 일반적인 싱가폴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규격화된 주거 형태 속에 사는 싱가폴인들의 삶은 과연 겉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행복한가. 에릭 쿠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동생들, 특히 여동생의 남자 관계에 광적으로 간섭하는 멩은 ‘통제‘의 전형과 폐해를 상징하며, 중국에서 데려온 나이 어린 아내 릴리에게 가난하고 못생겼다고 구박 받는 국수상인 아구는 돈으로 산 사랑의 비극적 결말을 맞는 주인공이다. 릴리 역시 늘 ＂당신네 정부는...＂ 운운하며 싱가폴을 비꼰다. 에릭 쿠가 유일하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산산은 뚱뚱한 몸매 때문에 놀림을 받고, 같이 살고 있는 어머니로부터도 끊임없이 잔소리를 듣는다. 에릭 쿠는 이들의 소외와 고독을 무표정하게 서있는 HDB 아파트의 모습으로 표현한다. (1997년 2회 부산국제영화제) 은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에릭 쿠 감독의 초기작이다. 그는 1997년 당시 싱가포르의 혼란스러운 사회적 분위기와 서민들의 현실을 여실히 투사하는 솔직한 화법으로 칸영화제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하며 일약 세계가 주목하는 감독의 대열에 올랐다. 싱가포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HDB 아파트는 성공적인 주택정책의 산물로, 국가에서 공급한 서민들의 보금자리다. 그러나 에릭 쿠 감독은 이 건물의 안과 밖이 얼마나 다른지를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가 응시하는 공동주택의 외양은 똑같은 집들이 성냥갑처럼 일사분란하게 들어선 모양이지만, 각 가정은 다양한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위로하고, 산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하는 방식을 실험적으로 표현한 부분들에서는 과감함이 드러나고 희화화된 인물의 무심한 대사에서는 매서운 문제의식이 느껴진다. 다양한 가치관과 삶의 모양들이 부딪치는 가운데 덩그러니 남게 되는 소외와 고독감이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2016년 제13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윤성은)